사막에 내리는 비
장마철 습기 속에서 사막을 떠올린다. 해는 이미 졌고 비가 그쳤음에도 습도계는 70을 가리킨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막은 유포르비아, 그리고 코덱스로 분류되는 두 종류의 식물이다. 각각 괴근과 다육식물로 분류되며 물을 저장하기 위해 부피 있는 몸체를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직광을 비추려고 거실 테이블 끄트머리 창가에 두었기 때문에 글 쓰는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인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지점은 이들이 의외로 물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거 봐, 손가락을 찔러 넣어보니 물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겉흙이 벌써 말랐다. 물론 하루 종일 바람과 해를 쐬니까 상대적으로 건조가 빠를 수 있지만 내 느낌에 이 ‘사막’ 식물들은 물에 탐욕스럽다. 물을 주고 난 며칠간 성장이 극적으로 빠르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고 곧게 솟아오른다. 이걸 봐, 내 작은 화분에 비가 내렸어, 라고 온몸으로 외친다. 건조한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물에 민감하고, 물을 잘 흡수하고, 물이라는 기회가 오면 있는 힘껏 성장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사막은 오랫동안 숨죽이다 물을 만나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번성하는 탐욕스러운 생명체라는 이미지다. 영화 ⟨듄⟩에 나오는 귀가 커다란 쥐, 그것은 새벽의 이슬조차 포집해 살아남는다. 사막은 목마르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막의 생명체 하나하나는 하나하나의 물방울처럼, 물의 지점, 물의 저장고처럼 응축되어 있다. 바싹 마른 해면이나 수세미에 물이 닿으면 말랑해지고 풀어지는 것처럼 사막도 장기적인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비’로 공급되는 물에 의해서 부풀었다가 건조하는 흐름으로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갯벌에 끊임없이 해수가 공급되어야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큐 ⟨수라⟩에서는 매립으로 오랫동안 말라가던 갯벌에 폭우가 내리자 이를 바닷물로 착각해 올라온 조개들이 집단으로 폐사했음을 증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개들의 목마름, 조개들의 희구, 조개들의 오해, 넘치는 물이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참담한 아이러니. 조개들의 죽음으로 인해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철새들이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죽음의 연쇄. 갯벌과 사막은 양극단의 이미지이지만 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물은 두 땅을 호흡하게 하고 숨어있던 생명들이 쏟아져 나오게 한다.
나는 ‘나비의 날’이라는 현상을 좋아하는데, 나비 연구자였던 나보코프(롤리타의 그 나보코프가 맞다)의 저서에서 안 것이다. 사막에 비가 내리면 침묵하던 씨앗과 알들이 폭발적으로 깨어난다. 이 수분이 사라지기 전에 성장하여 다음 세대를 남기기 위함이다. 이것은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지역에 서식하는 물고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킬리피쉬라고 하는 이 물고기는 우기에 알을 낳고 건기를 지나 부화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이 특성을 이용해 브리더들은 알을 우편으로 교환한 후 물과 공기를 공급하여 알을 깨운다. 그러니까 사막을 살아남는 방식은 오랜 기다림이다. 그리고 물때를 놓치지 않음이다. 오로지 자신의 그림자에 잠겨, 생명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바싹 마른 생명이라는 형태를 고수하며, 비가 오면 폭발적으로 변형(transformation) 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렇게 단절과 폭발을 감수하는 생명의 양식. 그 생명에 쏟아부어지는 물이라는 트리거. 아무리 장맛비가 쏟아진다 한들, 그것을 흡수하고 반응하지 못한다면, 그저 말라죽을 뿐이다. 목이 말라 아무리 물을 들이붓는다 한들 그것을 모조리 흡수하고도 모자란다면. 몇 방울의 물에도 대양을 만난 듯 기뻐하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