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들어 새에 관한 쓸 것을 생각했다. 우리는 새에 관한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네가 나를 부르는 이름의 기원은 새에 관한 꿈이었다. 겨울나무 꼭대기에 얹힌 까치집과, ‘새란 허공에서 기원하는 소리의 이름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글쓰기를 전부 잊은 것 같다. 로만 야콥슨의 실어증 연구에 따르면 은유적 실어증은 메타언어의 상실로 인한 개인방언에 처박히고 환유적 실어증은 컨텍스트를 상실하고 소아적 비문법 상태에 처한다. 나는 복합 실어증을 앓는다. 그로 인해 알레고리에서 추방당한다. 알레고리는 세계 곧 언어의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인데, 실어증자는 그것에 배제로서 포함되기 때문에 행위 곧 언어를 금지당하고, 그것이 실어증자의 위상학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 새에 관해 쓰지 않았다. 새에 관해 읽은 것도 아니고, 새를 열세 가지 방법으로 바라본 것도, 새를 키우거나 새를 잡아먹지도 않았다. 다만 해가 지고 나서, 자연학습 시간에 인공부화기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이 조금 자라 더 이상 병아리가 아니게 되면 도시에 유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것이 내가 오늘 경험한 새에 관한 전부인가, 하니 그렇지는 않았다. 해가 지기 전, 낮에 날개라는 상징에 관해 들었던 것이다.
사실상 소리에 관해. 소리는 형상으로서 날개와도 같은 어떤 것을 주조한다. 이때 날개는 기관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형태의 몸, 몸의 원형이다. 날개는, 날아오른다. (날지 못하는 새의 날개는 아이러니다. 닭은 날지 못하고 타조도, 펭귄도. 날지 못하는 새의 목록.) 즉 날개는 소리라는 기억 혹은 기록을 운반하며 상승하도록 되어있다. 날개가 새에서 추출된 것인가, 새가 날개로부터 자라난 것인가. 나머지 신체들은 퇴화한 것인가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새의 형이상학과 무관한 존재들인가. 새란 실어증을 앓고 있는 천사인가. (인어와 세이렌은 뱀 혹은 물고기와 인간의 결합인데, 무엇보다 그것은 꼬리를 가진다. 꼬리는 날개와 같은가. 그리고 그들 역시 실어증을 앓는다. 천사만이 언어적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천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고래에게는 다리가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다.) 이 의문문들은 은유인가, 알레고리인가, 실어증의 증상인가.
너는 과거 어느 밤에 새를 꿈꾸었다. 그 꿈은 나를 너의 연인으로 선언했다. 푸르게 갓 깨어난 새. 그 꿈으로 회귀하고 싶다. 그 꿈속에서 깃털을 말리고 진동의 받아쓰기에 불과한 울음소리를 내고 싶다. 그 꿈에서 깨어난 이후의 시간을 꿈이라고 선언하며. 여전히 나는 너의 새이고 너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므로, 우리는 유사성을 보존하며 양자를 교환한다.
내가 탄생한 고향이 산-언덕-아파트라면, 나의 신화는 하나의 심리테스트에서 시작한다. 물고기-뱀-새가 등장한다. 고등학교 운동장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질문을 받고 나는 그 신화를 고안해 냈다. 질문을 한 사람이 A였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정작 A는 심리테스트의 해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대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계통분류학은 어류, 파충류, 포유류, 조류를 분류한다. 다음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 땅과 바다의 경계에 거주하며 이주의 흔적을 지닌 고래와 박쥐가 있다. 고래 박물관에서 고래 화석에 다리가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한편 뱀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 모두 거주한다. 척삭동물은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등장했다고 한다. 이는 진화상의 단절을 상정하므로,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이 문제에 관해 서술했으며 후대의 진화론자들 역시 그러했다. 진화가 보다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다른 증거를 제시하거나 진화란 원래 비약한다는 식으로. 진화는 신체에 관한 실험이다. 날개와 꼬리지느러미와 다리. 타조는 달리고 펭귄은 헤엄친다. 달리거나 헤엄치는 인간도 있다. 물새들. 나는 다른 몸을 가진 나를 상상했다. 인간의 신체를 상징으로 포섭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내장을. 인간의 신체가 신의 모방이라면 신이 걸어 다닌단 말인가. 아니면 신을 모방한 원형 신체에서 분화되었다는 것인가. 신의 원형 신체는 물질 질료 원소의 떨림 그 자체와 관련된다—떨림 그 자체와 떨리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이를 동물 신체에서 유추해 내기에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나무와 유사하다. 식물, 광물, 물 불 흙 공기의 생명. 소화와 호흡과 감각, 이를 생명 현상으로 부르는 것이 오히려 이질적이다.
고통이 아니라, 공포가 문제다. 글쓰기는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노트에 강박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그 이전에 일기를 썼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 글쓰기가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나는 오로지 동생의 유년 시절을 기록하기 위해 썼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에 태어나 초등학교에서 쓴 일기장 묶음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후 일기장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공포로 가득 찼다. 일기에 반하는 글이었다. 알 수 없다는 공포, 이해할 수 없다는 공포,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들의 위계 혹은 경쟁에서 실패했다는 공포. 그것은 어떤 앎과 이해의 선행하는 기준을 전제했다. 바로 타자가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나는 모른다는 공포였다. 나는 비어 있었다. 나는 삶에서 주어진 것을 쓰기는 썼다. 그러나, 나의 신체와 생명은 더 오래되었다. 그 속에서 그것에 관해 말 그대로 쓸 수 없었다. 쓰는 것이 능력이라면, 내가 쓴 것은 무능력이었는데, 나는 비어 있었고 쓸 수 없었다. 그것이 내 존재가치의 하락으로 느껴졌다.
그것이 그렇게 내게 중요했던 까닭은, 쓸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타자를 이해하고 완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완전한 시간을 보내리라. 나는 신념을 가졌고 우정을 키워나갔다. 그것은 여전히 삶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삶으로 만들기 위해 발악했지만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그 삶은 완전한 시간을 보내는 데 방해가 되었다. 완전함과는 다른 것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체계였기 때문이다. 나는 불완전한 욕망을 발견했다. 다른 가능성, 올바름, 아름다움을. 나는 그런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고 그렇기 때문에 공포에 빠진다. 나에게서 당신을 데려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삶이, 나에게서 당신을 데려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욕망이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부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공포스럽다. 이 고백, 인식, 글이. 나는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은 척 남아 있다. 그러나 균열이 느껴진다. 너는 시간을 붙들고 있어. 너는 환상 속에 살고 있어. 너는 그 대가로 다른 것을 잃게 될 거야. 너를. 그러면 애인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고 사랑했던 기억마저 잊을 거야. 가끔 후회하고 금세 철회한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 모든 현실을 압도할 만큼 사랑한다. 당신이 그 사랑에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설 정도로. 그 정도로 사랑을 하고 싶다는 최초의 생각으로부터, 너의 사랑의 불을 꺼뜨렸다는 생각이, 들거나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