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성북동 옥탑에서 첼로를 배운다. 오늘 일곱 번째 레슨을 했다. 심리상담 중 쓴 글에서 첼로라는 키워드가 수면으로 떠올라 즉흥적으로 레슨을 알아보다 선생님을 만났다. 4월에는 성북동에서 청운동까지 바흐 무반주 조곡을 들으며 북악산 벚꽃길을 넘어 다녔다. 어린이날 천안에서 첼로를 가져온 후로는 버스를 탄다. 귀갓길 버스정류장 앞 과일 과게에서 큼지막한 참외와 파프리카를 사서 들어가 점심으로 먹는다.

고양이가 많이 아프다고 말씀드렸고 서촌 아니고 은평에서 악기 없이 바로 와 선생님 악기로 수업했다. 레슨 첫날처럼 형편없는 기분이 들었다. 첼로를 켜면 내가 얼마나 잡념이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팔의 감각에 집중해야 하고 물리적인 운동에 따르는 힘을 분배하고 버리고 억지로 쥐고 있지 않아야 한다. 어깨, 팔꿈치, 손등, 손가락, 활등, 손가락 끝과 지면이 맞닿는 지점까지 전부 의미가 있다. 선생님은 내가 활을 켜는 모습을 관찰한 다음 그에 부합하는 신체적 심리적 상태를 사실과 은유를 섞어 설명해 주신다. 이미지가 몸과 교환되며, 가야 하는 상태와 현재 혹은 가까운 과거의 상태가 교차한다. 그동안에도 속으로 또 수많은 잡념이 또 스쳐 지나간다. 수업 앞뒤로 쿠션처럼 대화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여성, 인간, 예술가, 활동가로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 여행을 떠난 동안 선생님에게 내어준 집 옥상에서 보이는 풍경을 스쳐 보내면서. 빨래가 걸려있거나 상추가 자라있거나 죽거나 살아있거나 한 순간들

고양이는 얼마나 풍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주제인가. 병은, 죽음은, 나이 듦과 병원비는. 연애와 어머니,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발발하는 뉴스들, 기후 위기와 코로나, 당면한 인류의 종말과 숙련된 운동선수 같은 쿨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관하여. 첼로를 켜는 일은 명상보다 스포츠에 가깝고 재활치료에 가까우며 자기 객관화를 동반하는 퍼포머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페다고지를 발전시킨 교사의 일이었다. 스스로를 또 타인을 가르치는 일

카드사에서, 직장에서,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면 또 그 전화를 받고 잡념에 사로잡힌다. 첼로를 켜는 동안에는 음 속으로 흩어져 혼자만의 우주에 빠져든다. 균형, 유머, 연습, 칭찬, 한 수업 한 수업이 재기 넘치는 소설가가 타이핑한 단편소설 같았다. 몸과 의식에 배어있는 부자유한 책임감, 사념, 그런 것들이 연주를 망친다. 움직임은, 오른쪽 손등과 왼쪽 손가락의 움직임마저도 협응을 이루기 어려우며 극과 극에 있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주의를 기울이기 실패하고 쉽게 비약한다. 활을 멈추면 반복되는 실패에 인내심 있는 설명을 들려주시고 팔로, 감각으로, 무게로, 중력과 그것들에 입혀놓은 이미지, 물 위에서 흔들리는 공이나 파도, 스케이트날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나는 쉽게 소리를 통제하려고 하지 몸을 느끼지 못한다.

날씨가 유달리 좋고 어디서나 산이 보이는 날들

카테고리 새와 별태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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