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창세기, 멈칫거림

어제 하루 야식과 술을 먹지 않았고, 몸을 쓰고 있다. 훨 낫다. 몸이 흐르고 흘러나가며 움직인다.

⟨브리하드아란야까 우파니샤드⟩와 ⟪말과 사물⟫을 읽고 잤다. 마제馬祭 , 죽음의 먹고 싶은 욕망, 먹기 위해 먹을 것을 만들며 더 많은 먹을 것을 위해 참고, 먹히려는 순간의 비명이 언어가 되는 창세기 신화. 이는 빛이 있으라, 보기에 좋았더라 하는 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나는 아我 ātman (몸이자 마음인 그것)를 갖추리라!”고 선언하고 그 몸을 만들기 위해 교합하며 먹기 위해 먹이며 제사를 지내는 죽음의 이야기다.

“옴ॐ, 새벽은 제물로 쓸 말의 머리다.” “이들 세상들은 그것의 몸의 부분들이다. 그러한 이 둘은 ‘예경하는 자’와 마제다. 그것은 다시 하나인 신, 바로 죽음이 된다. 그는 거듭되는 죽음을 물리친다. 죽음이 그에게 이르지 못한다. 죽음이 이의 아가 된다. 이 신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샹카라와 막스 뮐러를 참조하는 각주가 아주 길고 복잡하다. 하나의 신으로서 죽음인데 죽음을 물리치며 죽음이 된다고?
각주 25. 원인은 결과를 감싸며, 결과는 다른 결과를 덮고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아침에 모닝페이지 조금 썼으니까 밤엔 일기나 홈페이지에 올릴 글을 쓰고 싶었는데 멈칫했다. 뭘 써야 하는지. 어떻게, 어디서부터 써야 하는지. 이 멈칫거림.

“그래서 유토피아는 이야기와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에, 즉 유토피아는 언어와 직결되고 기본적으로 파불라의 차원에 속하는 반면에, 헤테로토피아는 화제를 메마르게 하고 말문을 막고 문법의 가능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와해하고 신화를 해체하고 문장의 서정성을 아예 없애 버린다.
어떤 실어증 환자들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양한 색깔의 털실 타래들을 일관성 있게 분류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 그러나 이 분류는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흐트러진다. 왜냐하면 이 분류를 떠받치는 동일 평면이 아무리 협소해도 실어증 환자에게는 너무 넓어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어증 환자는 한없이 모으고 분리하고 다양한 유사성을 늘어놓고 가장 명백한 유사성을 무효화하고 동일성을 깨트리고 서로 다른 기준들을 겹쳐 놓고 심적 동요를 내보이고 다시 시작하고 불안해하고 마침내 원인 모를 공포로 빠져든다.
보르헤스를 읽을 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거북함은 아마 언어가 손상된 사람의 깊은 불안과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장소와 이름의 “공통성”을 상실한 탓일 것이다. 아토피아atopie , 아파지아apasie.”

새벽 उषस्

  • 우샤스 Uṣás उषस् 새벽, 여명, 새벽의 여신
  • 아루나 Aruna अरुण 새벽빛, 붉은빛, 해가 뜨기 직전 은은한 빛
  • 아루노다야 Arunodaya 해 뜨기 직전 동트는 새벽녘
  • 브라흐마무후르타 Brahmamuhurta 해뜨기 약 1시간 36분 전부터 시작되는 신성하고 조용한 새벽 시간
카테고리 새와 별태그 #독서#일기

댓글 2개

  • @moosoo@moosoo.me 이게 별의 창에서 보는 새벽의 풍경인가요!!??? 너어어어어어어무 아름답네요. 진짜 새벽이구나라고 감탄하는 새벽이고 사진이네요. 아파지아apasie는 순간 아프지마로 보였네요 ㅎㅎ

댓글 남기기

댓글 작성자와 글 작성자만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비회원 댓글 수정/삭제에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