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오월미술제 학술포럼 ⟪등장의 미학: 발화하고 회절하는 여성과 예술⟫
파시즘에 대항하는 여성 — 구성적 지혜와 생명의 윤리
2026.5.15

세션 2. 돌봄을 기록하다 토론문_최별(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
세션에 할당된 돌봄이라는 단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고자 한다. 현재 광장과 사회운동의 담론화에서 돌봄이라는 키워드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는 돌봄의 비가시화를 비판하고 돌봄 사회로 전환을 주장해온 여성주의적 개입의 반향이며 일상에서 돌봄을 훈련하고 실천해온 여성 팬덤과 퀴어, 페미니스트가 주도한 이번 광장의 특수성 또한 녹아있다. 남태령 관련 활동을 하며 만난 연구자, 활동가들과 동지들은 돌봄을 남태령의 가장 인상깊은 특징으로 꼽고 이후 이어진 연대 투쟁에서 역시도 주요한 쟁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발표문은 지역 사회와 탄핵 광장에서 이루어진 돌봄에 주목하고 이를 영상으로 기록해온 실천의 내력을 담았다. 토론문에서는 발표문이 담아낸 구체적인 돌봄의 면면들이, 그것들이 늘 상주했다는 실제와 별개로 현재 사회운동 재현과 분석의 핵심으로 부상한 시대적 맥락을 간략히 짚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시대에 돌봄을 기록하는 실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큐 ⟨어른 김장하⟩와 ⟨남태령⟩이 돌봄을 기록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의미지어지는 지점은 이 작품들이 단순히 어떤 목표를 달성한 순간이나 전략, 이념이나 집단에 몰두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해당 작품들은 물질적, 정동적 자원의 순환과 연결을 통해 공동체와 관계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장면 자체를 포착한다. ⟨어른 김장하⟩에서 ‘어른’은 주는 사람, 베푸는 사람이고 지역 사회를 살리고 융성하게 하는 사람이다. 만일 김장하가 자원을 유통하지 않고 스스로나 가족에게 한정지었다면 교육과 의료를 통한 미래의 가능성은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농민이 땅으로부터 식량을 길러내고 자연 세계의 물질을 순환시키며 비인간 존재들과 인간을 연결하는 행위를 연상케 한다. 양자의 돌봄은 재생산, 즉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게 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세대와 공동체, 물질적 몸을 재생산하는 돌봄이 없다면 시간은 파편화되고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어가거나 돌아오는 생명력을 잃는다.
이 시대 돌봄이 중요하고 절박한 까닭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근대 국가의 이성애중심적, 가족주의적 재생산 규범이 경계를 넘는 돌봄에 정확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상품과 이윤 축적에 복무하기를 요구하는 파시즘은 목적없는 선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밥을 나눌 때, 그것은 우리 개인이나 혈연가족, 민족국가에 한정되어야 하며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위험하고, 낭비이며, 배신으로 돌아온다고 상상된다. 국가와 자본이 상정한 내집단의 경계를 벗어난 나눔과 감응, 공감과 소통, 타자성의 받아들임은 강력한 죄악시와 처벌, 낙인과 차별로 수세기에 걸쳐 죽임당했다. 이를 일컬어 레베카 솔닛은 봉쇄이자 굴레라고 칭했다.
파시즘은 인간의 본질,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통틀은 생명의 본질이 이기적일 것을 강제한다. 솔닛이 말한 봉쇄와 굴레는 상호주체성과 정동적 감응, 관계적 존재로서 생성을 봉쇄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극단적 상품화와 극우화로 치달은 파시즘이 당면한 딜레마는 파시즘이 구축한 배타적인 일상성이 계엄, 전쟁, 기후위기 등과 같은 압도적인 폭력과 재난 상황에 의해 깨어질 때 발생한다. 우리는 죽음과 고통 앞에서 평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과 고통 앞에서 내가 먼저 살겠다고 상대를 짓밟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가는 상대를 응시하고, 그를 구하고자 하며, 그러지 못한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공포와 불안으로 켜켜이 훈련된 강력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환대가 회귀하고 부활한다. 이러한 본능적, 실존적 감응과 응답이 솔닛이 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다.
우리는 여러 폭력과 재난 앞에서 스스로를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느끼고 상처입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해왔다. 이는 우리의 정동적이고 정치적인 역량을 무력화시키고 개인이나 가족의 안전, 각자도생, 임금노동과 경쟁에 한정시키는 억압과 착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와 이태원, 팔레스타인, 강남역 등의 사건과 장소에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애도하며 서로를 정치적 주체로 형성해왔다. 그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광주와 제주 4.3 등,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생명의 존엄과 정의를 지킨 역사적 해방공동체와 시민자치, 코뮌의 경험이 있다. 서로 돌볼 것이라고 상상되지 않고 금지된 존재들이 금기를 깨고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는 순간은 과거에 이미 그러했던 역사와 연결되며 저항의 저류를 형성한다.
폭력과 재난은 갈등으로 위장한 “가림막”을 부수고 개인으로 분할된 경계를 부순다. 무너져내린 세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이 억압했던 공동체가 부활한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선행하고 돌봄이 그것을 유지시키거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돌봄이 작동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형성된다. 돌봄이 나아가는 곳까지가 우리의 공동체가 되며, 돌봄이 멈추는 곳에서 공동체는 도전받고 질문에 처한다. 따라서 돌보는 주체는 정치적 주체이며 정치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 주체이다. 돌봄은 공동체에 누구를,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가를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하나 또는 여럿의 생명과 기억을 미래로 데려갈 수 있도록 유지시키며 그 관계의 가능성을 시간적으로 확장한다. 다차원적 의미에서 우리는 돌봄을 받거나 내어줌으로써 서로를 승인하고 갱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돌봄은 파시즘에 의한 정치와 공동체의 파괴에 대한 저항이며 정치적, 관계적 존재로 우리를 주장하는, 취약하고 평범한 존재들의 변혁이고 혁명이다.
남태령에서는 지하철 역사 화장실에서 자유발언 무대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유연하고 섬세한 조율들이 이루어졌다. 앞서 돌봄이 공동체적 존재와 정치 자체를 구성한다고 했다면, 남태령에서의 경험은 돌봄이 서로를 관계적인 차원에 놓음으로써 감각하고 조율하며 응답하게 만드는 행동을 필수적으로 수반함을 드러낸다. “서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지는 것”이라는 발표문의 표현과도 같이, 남태령의 참여자들은 동짓날 영하 20도의 아스팔트 위에서 안전감과 아늑함, “존재 자체로 괜찮은” 아이러니한 느낌을 느꼈다. 현재 전시중인 오월미술제 2관 무등갤러리의 작품에서는 당시 자유발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 때 계속해서 환호하고 박수치며 화답하는 목소리는 단순히 녹취된 텍스트의 키워드나 메시지로는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목소리들 간의 자장 속에서 정체성을 소개하는 발화, 폭력과 트라우마, 착취의 경험을 드러내는 발화는 비로소 어떤 응답을 받으며 개인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오월미술제 워크샵을 함께한 남태령 동지 피린님은 이를 일컬어 “해방공간”이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발표문이 드러내듯 “남태령에 화답하는 많은 기성세대들”이 있다. 오월미술제가 그러하고, 남태령에 계셨던 농민 활동가분들을 필두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을 경험하고 지역과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그룹들이다. 동지들은 스스로의 권력과 기존 운동의 한계를 성찰하고 변화하고자 하며 함께 나아갈 미래를 말씀하신다. 남태령이라는 사건 이후, 이전 세대의 ‘남태령 세대’에 대한 돌봄은 남태령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로 의미부여되고 정치적 힘과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이어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핵가족의 이해관계를 넘어 세대를 재생산하고 활동 경험과 자원을 전승하는 바톤터치는 단순히 남태령에 여성과 퀴어가 많았다, 라는 정체성 정치를 넘어 사회운동과 재생산 영역에서 돌봄 자체를 여성주의적이고 퀴어하며 운동적으로 전유하는 실천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서로의 싸움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다는 것은 각자의 몸과 일상에서 교차하고 있는 복잡성을 공동의 싸움을 상상하는 방식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사회운동이 남태령이라는 상징과 서사에서 길어올려야 하는 것은, 적극적인 상호 얽힘과 교감, 돌봄 속에서 운동이 실제로 굴러가는 방식을 그려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정하는 방식 그 자체다. 돌보기 위해서는 돌보는 대상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고, 관찰해야하고, 살펴야 하며 반응해야 한다. 이것은 실패하기도 하고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거듭되어야 한다. 또한 돌보고자 하는 사람과 노동을 존중하고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남태령, 그리고 돌봄의 방식이 사소화되고 저평가, 무가치해지지 않으며 제도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역사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돌봄을 기록하며 주류 언론이나 국가 공식 기록으로 대표되는 역사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아카이브를 만드는 실천이 필수적이다.
⟨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는 탄핵 광장 이후 곳곳의 남태령들에서 스스로를 “갈아넣는다”라고 표현하는 많은 동지들을 지원하고 연대하며 자원을 조달하는 백업 투쟁을 상상하고, 이들의 돌봄에 공적 의미를 부여하고 역사에 기입하는 우산조직이 되고 싶어서 만들어졌다. 남태령에서 일어난 오병이어와 단추스프의 기적처럼, 더 많은 돌봄들이 더 취약한 일상과 투쟁에 함께하는 경로들이 중층적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남태령 동지이자 연구자인 김해은 님이 말씀하셨듯 우리, 그리고 다큐 ⟨남태령⟩의 장르는 “히어로물이 아니라 로맨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