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묵주가 하나 있다. 어릴 적 동생이 달란트 시장에서 사 온, 하트모양의 플라스틱 비즈가 꿰어져 있는 것이다. 그건 한동안 상자에 넣어져 침대 밑에 있었고 어느 날 꺼내어져 육각형 모양 옷걸이의 한 돌출부에 다른 둥근 악세사리들과 함께 걸려 있었다—안국에서 산 뱀과 별이 달린 팔찌, 치앙마이에서 산 수정 조각이 달린 발찌와. 성산집에서 나오던 날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 묵주를 챙겼다. 아니다, 그날은 그냥 두었고 여행 배낭을 가지러 간 날에 챙겼던 것 같다. 묵주용 주머니에 담아서 가방에 넣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동생은 붉은색 주머니에 담긴 분홍색 묵주를 선물했다(엄마의 묵주는 나무 묵주였는데, 친한 언니가 선물해 주었다고 했다). 성기고 빳빳한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재단해 매듭 장식을 달고 벨크로 찍찍이로 여닫는, 미사포 주머니를 보다 작게 만들어 놓은 주머니. 성당에 다닐 적에 내 미사포 주머니는 군청색이었고 이건 붉은색이다. 군청색 주머니 안에 든 하얀색 미사포, 내 미사포는 레이스로 되어 있었고 엄마의 것은 끝단이 굵은 포도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하늘거리는 천 조각, 얼굴을 덮는, 서양에서 모자에 다는 것 같은, 이국적이고 여성스러운 사물이었다.
마리아, 그녀는 이국적이고, 여성스럽다. 그녀는 희고, 양초와 꽃, 조명에 둘러싸여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그녀를 먼저 본다. 그녀는 밖으로 노출되어 있고,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역시도 볼 수 있는 장소에 있다. 가톨릭 국가에서 그녀는 골목마다 장식되어 있다. 마치 동남아 국가의 힌두나 불교 상징물과 마찬가지로. 환타에 빨대를 꽂아 바치는 그 제단들처럼, 마리아 역시 그렇다. 서강동에 있는 성당의 담을 넘었던 날에도 그녀는 외부에 있었고 우리는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묵주기도는 다섯 단으로 된 다섯 개의 신비를 바치는 것이다. 시작점에서 종결하는 다섯 개의, 다섯 차례의 원이다. 그리고 한 단마다 열 번의 성모송—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도록 되어 있고, 시작점에서 관통했던 마리아의 얼굴에 다시 돌아오면 성모찬송—마리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되어 있다. 모든 묵주가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동생이 선물해 준 것은 별도 직선부인 십자가와 원을 이어주는 매듭이 마리아의 얼굴로 되어 있다. 마리아는 성스러운 어머니, 예수를 낳고 기른 사람이며 그를 상실한 사람, 예수가 죽었을 때 가장 고통받고 슬퍼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가장 사랑한 사람이며 예수의 가장 중요한 타인이다. 예수는 성애나 생식을 하지 않았고, 호모소셜한 사회에서 담론의 주체로 살다 죽었으므로, 그의 삶에서 유일한 성적 타자는 어머니 마리아이다. 묵주기도는 마리아라는 주체가 예수를 낳고, 기르고, 상실하여, 신적 반열에 오르는 이야기이다. 마리아는 신의 대리모, 신과 예수를 만나게 해주기 위한 자궁, 신의 자식인 예수를 인간으로 한정 짓는 물질적 재생산의 형식이다.
첫 번째 신비는 마리아가 주어이고 두 번째부터 마지막까지의 신비는 예수가 주어로 되어있다. 이때 예수는 표면상의 주어이고 그 배후에는 마리아가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 예수로 인하여 두렵거나 자랑스럽거나 가슴을 쥐어뜯는 마리아. 마리아가 본 풍경으로서의 예수. 마리아의 일생 사건으로서의 예수. 마리아에게 인내의 보상을, 생의 의미를 주는, 마리아의 연장된 육신으로 마리아의 꿈을 이루는 구원으로서의 예수.
⟪흰⟫에서 스물세 살 어머니는 혼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눈을 뜨고 곧 죽는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랐다. 한 아이가 죽은 자리에서 내가 나고 자랐다는 이야기. 나는 달떡같이 희고 예뻤던 그녀가 죽지 않고 자라나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가정을 한다.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고 한국이 떠들썩하던 무렵 ⟪흰⟫의 출간 예정 공고가 온라인 서점에 떴고 나는 이른 여름휴가를 라오스로 가기로 하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흰⟫을 라오스에 가져갔다. 눈과 얼음, 북구의 책을 적도의 습기로 가득 찬 아침 테라스 의자에 기대어 읽었다. 고개를 들면 우거진 열대 식물들, 농장을 돌아다니는 닭과 소, 사원, 식민 휴양지풍의 건축물 같은 게 보였다. ⟪흰⟫을 라오스에서 읽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는 ⟪흰⟫ 만을 가져갔고 다른 읽을 것은 없었다.
⟪흰⟫은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다. 나의 첫 번째 책, 삶의 중간을 노정해 주는 분기점으로서의 독서, 등등.
여성적 관계에 대한 책이고, 여성적 주체성에 대한 책이다. 은유이다. 흰 것의 목록과 그에 대한 이야기의 편린들, 그것은 존재의 당위가 주어지지 않는 존재들, 그리하여 생의 시작에서부터 소멸과 죽음에 가까웠던 존재들이 스스로 존재의 당위를 정립하는 이야기다. 여성, 첫째를 대신해 태어난 둘째,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는, 언제든 죽을 수 있었던 군집 속의 한 사람, 이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주체가 아니다. 이들은 타자로서 주체성을 구성하는 모순적인 존재들이기에, 늘 복수의, 다성적 관계와 분유 되어있는 몸들로서 존재한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나이고, 그녀에게 흰 것을 주는 존재로서 나이다.
묵주기도를 했는데, 그 새벽 꿈을 꾸었다. 나는 울면서 깼고, 네가 수납장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의 꿈속에서 나는 동생을 찬 방에 재우고, 이불을 깔아주지 않아서 슬퍼서 운다. 엄마가 깔아주던 보온매트가 버젓이 이불장에 있다. 그리고 집에서 들리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에 비명을 지른다. 그는 내 눈앞에서 뻔뻔하게 문을 잠근다. 어지러이 늘어놓은 신발들을 발로 대충 밀어내면서 닫히지 않던 문을. 나는 돌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침해에 무기력하고, 분노 속에서 쫓겨난다. 내가 동생이 준 묵주로 기도하는 이유, 일곱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 나의 일기를 읽고 자라, 내가 없는 동안 엄마의 자식이 되어주었으며, 나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내가 엄마에게 그러했듯이, 어떤 이별의 의식 없이 떠나온 동생.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고 이제는 미워하게 될 동생. 그녀는 나처럼 혼자 이십 대 초반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사라지도록 설계된 존재야. 우리는 필멸이야. 우리의 몸이 우리에게 말해주기 시작했어. 성장의 정점에 다다른 이후부터. 우발적으로, 사고가 나서, 병이 나서 죽는 것 말고도, 그냥 우리는 죽게 되어 있다고. 앞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애도일 수밖에 없어. 우리가 영원하다면, 우리의 관계에는 그런 비애조의 색채가 깃들지 않을 거야.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고, 실수를 만회할 수도 있고, 여러 개의 가능성을 다 실험해 볼 수도 있고, 그럴 테니까. 그럼에도 왜 우리는 죽는 것이나, 사라지는 것, 헤어지는 것에 고통을 느끼도록 되어 있을까? 그것은 왜 이렇게 슬플까? 매 순간, 매분, 매초를 떠나는 것, 허공으로, 깎아지른 투명한 벼랑에서 발을 내딛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정지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은 왜 슬픔의 정조로 되어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 나는 애도와, 회복만을 기대해. 처음처럼은 되지 않을 회복, 흉터가 남을 회복을.
2016
⟪흰⟫을 읽었다. 네 장의 미지, 이미지, 이미지라는 이름 있을 것 같아.
첫 번째는 구름이었고 두 번째는 얼어붙은 강물과 눈이 쌓인 땅의 경계, 세 번째는 갯벌, 석벽이었고 네 번째는 동이 트는 지평선, 혹은 수평선, 검은 어둠이 벌어지고 있었다. 희게. 나는 꼬마전구가 둘러져 있는 관목에서 피어난 손톱처럼 작은 흰 꽃 세 송이를 책갈피에 끼워 눌렀다.
꽃잎이 말려드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이 역시 흰 것이므로.
네가 나무 계단을 밟고 도미토리에서 내려와 꿈 얘기를 했다. 의자를 빼어 앉으면서, 지퍼백에 든 세면도구를 그대로 든 채로, 꿈에서 나를 보았다면서. 머리는 부스스했고 볼은 부어있었는데, “숙성되어 맛이 기막힌” 망고 한 접시를 먹고 있었다.
그가 의자를 묶어놓았던 체인을 끄를 때 나는 책 읽기를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검은색, 흰색, 점박이까지 세 마리의 새끼를 낳은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고양이는 노란색이었는데도. 완전히 검은, 완전히 흰,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빗속에서 고양이는 불러도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