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파랑
세계가 파랗게 녹슨다. 청동 화병에 꽂힌 푸른 장미. 우리는 그것을 저녁과 새벽이라 부른다. 파랑은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주의를 잃은 사이 세계는 그저 어둡거나 밝다. 파랑은 밀려들고 잠식하여 순식간에 뒤덮는다. 폐허에 슨 이끼. 바위에 번진 지의류. 파랑은 세상에 점멸하여 생을 융성하게 하는 태양 빛의 난색을 얼린다. 파랑 속에서 우리는 온도를 잃고 색을 잃으며 개체성을 잃고 한 덩어리가 된다. 파랑 속에서 우리는 생도 죽음도 아니며 오직 파랑이다. 찰나의 파랑을 기다리며 낮과 밤을 낭비하는 존재들. 파랑 속에 기거하고 파랑 속에서만 느낄 줄 알며 말할 줄 아는 존재들. 파랑 속에서만 윤곽을 드러내는 존재들. 파랑으로서만 기능하며, 파랑으로서만 숨 쉬는 존재들. 땅거미가 푸른 날 정신을 잃고 배회하는 존재들. 파랑에 숨이 막히면서도 파랑으로 뛰어드는 존재들. 파랑에 녹고 파랑에 얼며 파랑에 기겁하고 파랑에 질색해 파랑에 돌고 파랑을 마시며. 파랑이 엄습하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부서져 버리는 존재들. 숨죽이고 파랑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유약한. 파랑으로 구덩이를 채우고 파랑을 심장이라 믿는 착각. 파랑으로 기어다니는 파랑. 오직 파랑으로 몸의 모든 구멍을 채워 넣고자 하는.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파랑. 유령 같은 파랑. 시간의 모든 유령들이 집합한 듯한 파랑. 눈을 가린 채 입 맞추는 파랑. 유령과 교접하는 파랑. 죽일 듯이 섹스하는 파랑. 눈물 같은 파랑.
파랗기 직전 새들은 운다. 파랑에 대한 두려움에 질려서. 희열에 들떠서. 새들이 울기 시작하면 금세 파랑이다. 새들의 울음과 파랑 사이의 무한한 간격. 그 간격 속에서 파랑새가 태어난다. 새는 시간을 디디며 아주 가벼운 발자국을 찍는다. 그것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들을 잡아먹는다. 벌레들은 독특한 악취를 풍기며 파랑새의 날개 속으로 파고든다. 날갯짓이 길을 잃을 때
벌레들이 갉아 먹은 깃털이 바스러질 때 그 깃털로 된 머리털을 가진 존재들이 태어난다.
그의 머리를 갈라 보면 머릿속엔 온통 깃털 부스러기뿐이다.
그의 생각은 그것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파랑이 내리면 그것들은 얼어붙어 하나의 상형문자를 만드는 데 그의 생각은 그것에 사로잡혀 골몰한다. 그것이 파랑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지평선에 걸릴 때 파랑의 긴 이름이 짜맞추어진다.
그들은 글자의 파편을 그러쥐고 그것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파랑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구인가
파랑을 내리기 위해 파랑에 담갔다 건져지는 맨입술들을 오려낸 이는 누구인가 그 잇새로 새어 나오는
허밍
속삭임
말이 되지 않는 속삭임
짖음
떪
식은땀을 흘림
종이처럼 편평해진 세계
주머니에 접어 다니는 한 장의 쪽지
나의 마음은 오래전에 그 문자를 잃었음에도
그 쪽지를 부적처럼 지니는 까닭은
그것만이 내가 너의 이름을 들었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