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목록은 절망의 목록이다.
소원은 과거에 대한 소원과 미래에 대한 소원으로 나뉜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원, 거기서부터 삶을 다시 그려내고자 하는 소원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지금이 어떠하든 미래에 어떤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이다.
여기에 제약이 붙는다. 소원이 단 한 가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옛날이야기에서는 수적 제약을 걸어두고 있다. 왜 무한한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없는 것일까? 소원이란 무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일까? 소원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어리석은 소원으로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고 만다.
여기서 나는 다시 소원을 비는 두 가지 마음을 제시한다. 하나는 망설이는 마음이다. 무엇이 나에게 최선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는 소원이다. 다른 하나는 감수하는 마음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이 소원만 이루어진다면 괜찮다는 것이다.
결국 소원이 드러내 주는 것은 소원을 비는 사람 그 자신이다.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신은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불가능하다고 느끼는가? 당신이 현재 삶에서 닥친 막다른 절벽은 어디이며 당신은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당신 스스로 이뤄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바는 무엇이며 소원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기적이라고 불안해하는 바는 무엇인가? 혹은 당신의 삶을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한 화살로 벼려냄에 있어 그 과녁을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
결국 이것은 이야기이다. 하나의 소원은 하나의 삶당 하나의 과녁이라는 인위적인 형식을 설정한다. 우리는 그 소원을 한없이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거부하거나 명징한 것으로 믿고 그것에 투신할 수 있다. 가령 내가 립스틱 한 개를 소원한다면, 그것은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어딘가에 두고 잊어버릴 것이고 끝까지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속한 시간 선에 립스틱 한 개의 무게와 수행성이 더해짐으로써 변화하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소원을 빈다면 어떨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소원, 태어났더라도 지금과 같이 살지 않았으리라는 소원, 이미 낭비해 버린 시간을 되돌려달라는 소원, 지나간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경험하게 해달라는 소원, 읽은 모든 책과 배웠던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달라는 소원, 인간이 아닌 바람이 되게 해달라는 소원, 전생과 후생을 모두 기억하게 해달라는 소원.
이 소원의 리스트는 한 개인으로서는 결코 그럴 수 없는 불가능성과 절망의 목록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신적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결과적으로 소원을 빈다는 것은 나의 삶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재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너진 다리, 부서진 파편, 쓰러져 버린 도미노.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재확인. 소원을 떠올릴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짙어진다. 과연 이 불가능성은 삶에서 어떤 한 가지 소원이 가능하도록 제대로 겨냥되어 있는가? 그러니까 내 삶에서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선택지들을 잘 잘라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갓 피기 직전의 꽃송이를 실수로 자른다거나, 작동하고 있는 전선을 끊어버린다거나 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잘라내고 도려내어 망가진 삶이 이 우주가 실험 중인 무수한 삶의 한 더미로 이미 버려진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소원을 빌어야 한다. 바랄 줄 모르는 것에 대한 소원을 빌어야 한다. 버려진 삶, 궤도를 이탈한 삶, 어떤 쓸모나 목적성을 갖지 못하게 된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에 대한 소원을 빌어야 한다. 나라는 사람의 사회적 꼴을 어찌저찌 유지하는 것과, 완전히 잊힐지언정 비밀을 완수하는 삶, 두 가지 사이에서 나는 후자를 택하고 싶다고 욕망하면서 동시에 깊은 공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