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숨
고장 난 선풍기, 라는 말을 읊조리니 문득 제습기 물 비우던 생각이 났다.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제습기에는 삽시간에 물이 찼다. 그 집은 비스듬한 언덕에 지어져, 한쪽 면은 지상층이고 한쪽 면은 지하층이었다. 그러니까 안쪽 벽의 경우 흙더미로 완전히 막혀, 창문을 뚫는다 해도 무소용인 집이었다. 나는 녹색 가죽 소파를 환한 거실 창가에 바짝 붙이고 새소리를 듣곤 했지만, 내벽에 닿아있던 책에는 어김없이 초록 곰팡이가 슬었다. 내 책에는 그 얼룩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난 책을 깨끗이 보는 사람이 못 된다.
장마철이 되면 선풍기를 24시간 틀어도 집은 동굴에 든 듯 습했다. 그러니까 어둡고, 서늘하고, 차음을 한 듯 먹먹하게 조용했다. 가장 안쪽 주방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을 열면 집 전체 넓이에 육박하는 지하실로 내려갈 수가 있었다. 그 집을 임대할 때는 지하실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넓은 간이 테이블을 두고 나뭇조각을 썬다거나 하는, 그 뒤로 벌어진 일들은 그런 일상과 거리가 멀었다. 타파통이며 쓰지 않는 가전 따위를 쌓아 올려 봉해진 지하실은 그 집 전체의 그림자였다. 어둠의 물침대 같은 것 위에 둥둥 뜬 채 잠을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해가 드는 마당 텃밭에서는 식물이 제법 자랐다. 목화와, 콩과, 옥수수, 토마토와 가지 같은 것들이 말이다. 해를 듬뿍 받고 영근 열매를 집 안의 어둠으로 끌고 들어가 뿌듯하게 매달아두곤 했다. 그것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집 안을 밝히고 재로 산화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럼 그 재는 다시 바닥에 쌓이고 집 안을 뿌옇게 만들고 아무리 바깥으로 나간다 한들 내 발자국에는 그 잿가루가 묻어날 테고,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왜 엄습하고, 깨끗이 쓰여 불태워지는 것이 불가능할까? 기억이라는 것은 채 애도하지 못해 승화되지 않은 찌꺼기 같은 것일까? 아무리 해드는 미래에 있어도, 사방으로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도, 시선 닿는 곳에 푸른 나무들이며 붉은 지붕들이 이곳이 지상이라고 웅변해도, 막다른 벽에 달달거리며 바람을 쏟아붓던 플라스틱 선풍기 생각을 한다. 그 조야한 기계만이 그 공간에 부는 유일한 바람이었다면, 그건 고장이었을까, 지하 세계가 쉬는 숨이었을까. 최대한 피부에 닿지 않는 민소매 원피스 같은 걸 입고, 맨발로 그 집의 끝과 끝을 잇는 선분을 그리고, 안쪽으로, 안쪽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며, 다다를 곳이란 내면뿐임을, 그렇게 물질세계와 연결된 통로이자 도구, 하나뿐인 생명으로서 몸을 습기 속에 방치하고, 곰팡이들에게 내어주고, 그렇게 포자가 된다 한들 읽다 만 책 등 위에나 기거하고, 그러다 문득, 이명처럼 들려오는 선풍기 소음에 돌아올 길을 찾는 것이다. 아, 고장 난 것은 나이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