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멘 Ekumen

어둠의 왼손

헤인의 기록 보관소에서. 앤서블 서류 <01-01101-934-2-게센>의 사본: 올룰의 스테빌에게: 게센/겨울 행성의 제1모빌인 겐리 아이로부터의 보고. 에큐멘력 1490~1497, 헤인 사이클 93.

에큐멘에서는 권력이라는 것이 지극히 미묘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에큐멘의 스테빌들은 아주 인내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에스트라벤 경. 그 사람들은 카르히데를 비롯한 게센 사람들이 전 인류에 합류할지 여부를 고민할 동안 100년이고 500년이고 기다릴 겁니다.”

“하지만 에큐멘은 지배하지 않습니다. 조화를 이루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에큐멘의 권력이라는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동맹 국가들과 행성들의 권력입니다. 에큐멘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카르히데는 영원히 위협받지 않고 그 중요성을 더욱더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에큐멘은 인류 전체의 이익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오르고레인은 전체의 이익을 부분의 이익에 앞세운 경험이 있지만, 카르히데는 그런 경험이 거의 전무합니다. 그리고 오르고레인 친교체는 지성은 없어도 대부분 제정신인 사람들인 데 반해, 카르히데의 왕은 제정신이 아닐뿐더러 멍청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이곳에서 내가 맡은 일은 혼자서 처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모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어떤 세계에 에큐멘에 대한 최초의 소식을 전할 때는 한 명이 그곳에 직접 가 머무르며 음성을 통해 전달한다. 물론 타우르스-4에서 페렐지가 그랬듯 살해될 수도 있고, 가오에서 최초의 모빌 세 명이 차례차례 당했던 것처럼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어 감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는 계속된다. 결국은 성공하기 때문이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진실을 말하는 하나의 목소리는 함대나 군대보다도 더 강력하다. 그리고 에큐멘에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아니, 너에겐 없어.’ 내면의 목소리가 말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침묵시켰고, 평온함과 결의로 가득 차 제2시에 왕을 알현하러 왕궁으로 갔다. 왕을 만나기도 전, 대기실에서부터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 점에 대해 저는 숨기는 게 없습니다, 폐하. 에큐멘은 게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싶어합니다.”
“무엇 때문에?”
“물질적인 이익. 지식의 확대. 지적 생명체의 활동 분야 증대를 위해서입니다. 조화를 증폭시키고 신께 영광을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호기심과 모험심, 환희를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배자들, 왕과 정복자, 독재자와 장군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자들의 말에는 아르가벤의 질문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아르가벤은 우울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화롯불에 시선을 둔 채 계속 두 발에 번갈아 중심을 옮겨가며 몸을 흔들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있는 그 에큐멘이라는 왕국이 얼마나 크지?”
“에큐멘은 83개의 거주 행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는 약 3천 개의 국가 또는 민족 그룹들이…….”
“3천 개라고? 알았어. 그렇다면 왜 우리가 진공에 있는 저 괴물 같은 3천 개의 국가들과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봐.”

“83개의 행성에 3천 개의 국가가 있습니다, 폐하. 하지만 게센에서 가장 가까운 곳도 아광속 우주선으로 17년이 걸려야 갈 수 있습니다. 만약 게센이 이 이웃들로부터 약탈이나 침략을 당할까 걱정이시라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약탈을 하기 위해 우주를 가로질러 온다는 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짓입니다.” 나는 전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르히데어에는 ‘전쟁’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역은 사정이 다릅니다. 사상과 기술은 앤서블을 통해 전달됩니다. 물자와 예술품들은 유인 또는 무인 우주선으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대사와 학자, 상인들이 이곳에 올 수 있고 또한 여기 주민들 가운데 그곳에 갈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에큐멘은 왕국이 아니라 협력 기구로, 무역과 지식의 교환소 같은 곳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사는 행성들 사이 왕래에 큰 혼란이 야기되고, 폐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무역이 크나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만약 네트워크와 그것의 구심점이 없다면, 그래서 통제도 없고 작업의 연속성도 없다면 인간의 짧은 생명으로는 행성과 행성 사이 시간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에큐멘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입니다, 폐하. 우리 모두, 전 우주의 인간들은 무한히 먼 과거에 헤인이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퍼져나와 정착했습니다. 우리는 다양하지만 여전히 같은 화로의 아들인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아시다시피, 저는 게센에 온 첫 번째 외계인이 아닙니다. 저보다 먼저 조사대가 왔었지요. 조사대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게센인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정체를 숨기며 1년에 걸쳐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 다도해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에큐멘 위원회에 보고를 했습니다. 그게 약 40년 전, 폐하의 조부께서 통치하시던 때의 일입니다. 보고서는 무척이나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사대가 모아온 정보와 녹음해온 언어를 학습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 장치가 작동하는 걸 보고 싶으십니까, 폐하?”

‘게센 카르히데의 아르가벤 왕에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무엇이 사람을 반역자로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반역자라고 여기지 않으며, 이것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93/1491/45, 헤인의 사이레에서 스테빌들을 대표하여, 스피몰 G. F.가.’

“그리고 만일 에큐멘 사람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그대 혼자만 보내지 않았을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사기지. 외계인들이 천 명은 있을걸.”
“하지만 문 하나를 열기 위해 천 명이나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폐하.”
“계속 열어두자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에큐멘은 폐하께서 문을 열 때까지 계속 기다릴 겁니다. 그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여기에 혼자 왔고, 혼자 남아 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에큐멘을 위한 내 임무를 완성하려면 내 전 생애가 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만큼 걸릴 터였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행동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정보를 모으고, 정보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잠을 자두라는 에큐멘 학교의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었다.

내가 좀 더 알게 되면 될수록 에스트라벤의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몇 세기에 걸쳐 통일을 누려온 이 유사 국가는 저마다 자기 주장과 목소리를 지닌 영지, 도시, 마을들, ‘유사 봉건 부족 경제 단위들’이 마구잡이로 혼합된 집합체이자 활기차고 유능하고 논쟁을 좋아하는 이들이 아무렇게나 모인 집합체로, 그 위에 권력 기구들이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얹혀져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 무엇도 카르히데를 통합할 수는 없었다. 빠른 통신 도구들의 보급은 거의 필연적으로 민족주의를 가져오는데, 여기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에큐멘으로서는 도저히 이 사람들을 하나의 사회 단위로서, 역동적 실체로서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몹시 흥분했다. 물론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게센인들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훗날 그것은 쓸모있는 지식임이 증명되었다.

이 조그만 나라가 다른 조그만 나라에 설치한 대사관의 직원수는, 헤인의 에큐멘 스테빌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 수보다도 많았다.

“당신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에스트라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어떤 면에서는요. 하지만 제 임무는 모든 개인적인 부채와 충의에 앞섭니다.”

옵슬레가 물었다. “에큐멘이란 무엇입니까? 세계입니까, 세계들의 연합입니까? 장소입니까? 정부입니까?”
“음, 그 모두이기도 하고 그 어느 것도 아니기도 합니다. 에큐멘은 우리 테라 용어입니다. 공용어로는 ‘가족’이라 부릅니다. 카르히데어로는 ‘화로’라고 하겠지요. 오르고레인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이곳 말을 잘 알지 못하거든요. ‘친교그룹’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친교 정부와 에큐멘 사이에 분명히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요. 하지만 에큐멘은 본질적으로 정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화적 기구와 정치적 기구를 재통합하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시도는 대부분 실패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러한 실패조차도 이전까지의 다른 그 어떤 방식들보다도 인간성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냈습니다. 그것은 사회이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문화입니다. 교육의 한 형태입니다. 어찌 보자면 규모가 아주 큰 학교라 할 수 있지요. 아주아주 큰 학교 말입니다. 그 본질은 상호 의사소통과 협동이며, 따라서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연맹 또는 연합체로 약간의 중앙집권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대표하는 것이 바로 그 관점, 연맹입니다. 정치적 실체로서의 에큐멘은 통치가 아니라 협동을 통해 기능합니다. 법을 강제하지 않으며, 결정은 여론이나 명령이 아니라 평의회와 동의를 거쳐 내려집니다. 경제 실체로서 에큐멘은 아주 생동적이며, 내부 세계의 정보 교환을 통해 80개 세계 사이의 무역 균형을 유지합니다. 정확하게는 84개입니다. 만약 게센이 에큐멘에 가입하게 된다면 말이지요…….”
“법을 강제하지 않는다니 무슨 뜻입니까?” 슬로세가 말했다.
“법이 없습니다. 회원 국가들은 각자 자기 법을 따릅니다. 회원 간에 충돌이 있을 때는 에큐멘이 중재에 나서서 법적, 윤리적 조정을 하거나 검토, 선택을 하도록 합니다. 만일 초유기체 조직으로서 실험이라 할 수 있는 에큐멘이 결국 실패한다면, 에큐멘은 평화 유지군이 되고 경찰 조직을 꾸리는 식으로 가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중심 세계들은 몇 세기 전에 있던 재앙의 시대로부터 회복되고 있으며, 잃어버린 기술과 사상을 재건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배우고 다시 익히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없는 사람들에게 ‘적의 시대’에 대해, 그리고 그 후유증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임의 주최자이자 섬세하고 작은 몸집에 눈매가 날카로운 예게이 친교인이 느릿느릿 말했다. “아주 근사하군요, 아이 씨. 하지만 에큐멘이 우리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84번째 세계가 에큐멘에 무슨 이익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이곳이 그다지 매력적인 세계도 아니잖습니까. 우리에게는 에큐멘 세계에 다 있는 우주선도 없고 말입니다.”
“헤인인과 세티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우리 역시 모두가 우주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세기 동안 우주선을 허락받지 못한 세계들도 있었습니다. 에큐멘이 기준을 확립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자유무역이라 부르는 걸로 압니다.” 내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유무역이란 말은 바로 예게이가 속한 당 또는 파벌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자유무역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물품뿐 아니라, 지식, 기술, 사상, 철학, 예술, 의학, 과학, 학술 등 온갖 분야에 대해서 말입니다……. 게센인들이 다른 세계와 직접 왕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옴세라 부르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에큐멘 세계인 올룰까지도 17광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가장 먼 세계는 250광년 떨어져 있으며, 그곳의 항성은 여기에서 보이지조차 않습니다. 하지만 앤서블 교신기를 이용하면, 여러분은 마치 이웃 도시의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그 세계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곳에서 온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무역은 굉장한 이익을 낳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자 수송보다는 주로 정보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여기에서 제 임무는 여러분이 다른 인류와 교류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슬로세가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여기서 ‘여러분’이라는 건 오르고레인입니까 아니면 게센 전체를 뜻하는 겁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예상 밖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오르고레인을 뜻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시스, 섬 국가들 또는 카르히데가 에큐멘에 가입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게센처럼 고도로 발달한 행성이 에큐멘에 가입한다면, 그 행성에서 조정자로 행동하고 다른 행성에 대표 역할을 할 기구가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용어로는 지역 스테빌리티라 부르는 기구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양한 민족, 지역, 국가는 하나로 통일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도 절약되고 또한 분담에 의해 비용도 절약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직접 우주선을 만든다면 말입니다.”

에스트라벤은 휘파람 부는 나를 바라보았지만(이해한다), 짜증 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꿈꾸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신의 우주선에 대해 작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당신 혼자 이 세계에 보낸 겁니까?”
“첫 번째 특사는 늘 혼자 옵니다. 외계인 한 명은 호기심을 유발하지만 둘은 침입으로 간주되기 쉬우니까요.”
“첫 번째 특사의 생명은 가볍게 다루어지나 보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큐멘은 어느 누구의 생명도 가벼이 다루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명, 스무 명이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한 명이 위험에 빠지는 게 낫지요. 또한 사람들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큰 도약을 하게 해 실어 나르는 건 아주 비싸고 시간도 많이 들지요. 어쨌든 이 일을 원한 건 저였습니다.”
“위험 속에 영광이.” 에스트라벤이 말했다. 속담인 게 분명했다. 뒤이어 나지막이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카르히데에 도착하는 날, 굉장한 영광을 얻게 될 겁니다…….”

아이가 침낭 속에서 묻는다. “뭘 쓰는 겁니까, 하르스?”
“기록입니다.”
아이가 살짝 소리 내어 웃는다. “저도 에큐멘 일지를 써야 합니다. 하지만 음성 기록기 없이는 잘 되지 않더군요.”
나는 내 기록은 에스트레의 내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그 사람들이 검토해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영지의 기록 보관소에 취합할 거라고 아이에게 설명한다.

“에큐멘에는 고도로 발달된 문화, 복잡한 사회, 철학, 예술, 윤리 등의 방면에서 세련된 형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돌 하나의 무게도 정확히 재는 법을 모르지요. 물론 어떻게 재는지 배울 수는 있습니다. 단지 지난 50만 년 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또한 고등수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가장 단순한 산술의 응용밖에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미적분학을 이해할 능력이 있지만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한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제 종족인 테라인들도 3천 년 전까지는 0의 사용법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 말에 에스트라벤이 놀라 눈을 끔벅였다. “게센에게서 제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예언의 능력을 갖출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정신 진화의 일부분인가, 당신들이 그 기술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당신은 혼자 왔습니까? 왜 혼자 보내졌습니까? 여전히 모든 것은 그 우주선이 오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 당신을, 우리를 어려운 상황으로 몬 겁니까?”
“그건 에큐멘의 관습입니다. 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가 혼자 온 게 여러분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홀몸에 무방비 상태로 나타남으로서 당신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위험도 아니고 어떤 균형을 깨뜨릴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침략이 아니라 단순한 사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저 혼자서는 여러분을, 여러분의 세계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뀔 수 있지요. 혼자이기에, 저는 제 주장을 펼침과 동시에 여러분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혼자이기에, 만약 제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면 그 관계는 단지 정치적이고 비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됩니다. 그 관계는 정치적인 관계 이상이기도 하고 그 이하이기도 하지요. 우리와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와 그것이 아닙니다. 나와 너의 관계인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실용적인 것도 아닌, 영적인 것이지요. 어떤 의미에서, 에큐멘은 정치 집단이 아니라 영적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시작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시작과 방법이 중요합니다. 에큐멘의 정식 정책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에큐멘은 미묘한 방법으로, 느리고 이상하고 위험한 방법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마치 진화의 과정처럼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에큐멘은 그걸 모델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홀로 보내졌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아니면 저를 위해서? 그건 저도 모릅니다.”

“카르히데가 에큐멘에 합류하기 전에 충족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르가벤 왕은 당신의 추방을 철회해야 합니다.”
에스트라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다. “진심입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겐리.” 에스트라벤이 말했다. 에스트라벤이 지금처럼 아주 부드럽게 말할 때면 허스키하고 울림이 없는 여자 목소리가 된다. 에스트라벤은 부드럽지만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전 오랫동안 고향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으니까요. 이번 추방도 제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당신은 자신과 에큐멘의 일을 잘 하시면 됩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혼자 해나가야 합니다.”

“배신이 아닙니다. 에스트라벤은 어느 한 국가가 먼저 에큐멘과 동맹을 맺으면 다른 곳이 자연히 그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스, 페룬테르, 다도해 역시 뒤를 따를 겁니다. 그리고 통일이 이루어질 겁니다. 에스트라벤은 자기 나라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폐하. 하지만 카르히데나 폐하를 위해 봉사한 게 아닙니다. 에스트라벤은 제가 섬기는 주인을 섬겼습니다.”
“에큐멘?” 아르가벤이 놀라 말했다.
“아닙니다, 인류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고, 진실인 면이 있었다. 에스트라벤의 행동은 그의 개인적인 성실성과 한 인간에 대한 책임과 우정에서 우러나왔다고 말하는 것 또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 터다.
왕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주름지고 눈 아래가 처진 우울한 얼굴을 다시 화로 쪽으로 돌렸다.
“왜 카르히데에 돌아온 사실을 내게 알리기 전에 배에 연락을 했지?”
“폐하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폐하에게 보내는 서한은 분명 티베 경에게 들어갈 터였고, 그러면 티베 경은 저를 오르고레인으로 넘기거나 총살했을 겁니다. 제 친구를 쏴 죽였듯이요.”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개인의 안전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저는 게센과 에큐멘에 대한 의무, 임무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 임무를 달성할 기회를 저 자신에게 보장하기 위해 먼저 배에 신호를 보낸 겁니다. 이것은 에스트라벤의 충고였으며, 그 충고가 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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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 @moosoo@moosoo.me 넘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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